도이창 아카족 Story

정신적 지도자 '피코 사에두'

Royal Project

아카족는 중국 중부에서 티벳, 네팔과 버마를 

경유하여 왔다는게 정설로 알려져 있으며, 

태국에만 7만여명 살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카족은 태국 북부 

치앙라이와 치앙마이 고산지대에 정착하는데,

그 중 일부가 도이창 빌리지에 정착한 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어쩔 수없이 아편을 키우며, 그로 

인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문제는 아카족은 태국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교육 및 의료혜택등 기본적인 혜택을 태국정부로부터 받을 수 없었고,이로 인해 그들은 불법노동(주로 아편 

재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제노역, 마약중독과 각종 범죄 등에 연루되었고, 

도시의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기 쉬운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이러한 안타까운 사정을 접한 푸미폰 

아둔야뎃의 태국 왕실 주도하에, 로열프로젝트(Royal Project)가 시작됩니다. 

각종 정보를 수집한 결과, 

도이창 지역 기후가 커피 재배에는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태국 왕실은 아카족에게 아편의 재배를 멈추고 커피재배를 권장했지만,

아카족은 커피재배를 해본적이 없었고, 

커피나무를 키우기 위해 최고 수년 동안은 산기슭을 개간하고 새로운 품종의 나무를 심고 기다려야 하는 고되고 힘든 시간을 버터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속에서, 쿤 위차 프롬용 (Khun Wicha Promyong)이라는 지도자의 지휘하에, 

치앙라이 고산지역 가파른 언덕에서 수년 동안 

걸쳐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카족 고유의 

근면 성실함과 삶에 대한 의지로 커피재배, 연구개발과 생산 등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수년간의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DoiChaang Original Coffee Co.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이고 성공적인 커피 생산자로 

자리 매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속적인 최고의 스페셜티커피

생산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진행형입니다.

도이창 아카족의 비밀?

태국 고산족들 중 아카족이 유독 한국인 여행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풍습이 역사책에 나타난 

고구려 풍습과 판박이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데릴사위제를 유지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형사취수’까지 고구려 옛 풍습을 닮았습니다. 

닭을 옆에 두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우리 옛 풍습과 비슷합니다.

아카족이 김치를 담가 먹는 것도 경이롭습니다. 

아카족은 김치를 ‘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김치를 ‘묵은 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지가 김치의 어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에 담은 아카족의 ‘지’는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거의 백김치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우리가 고춧가루를 넣은 김치를 먹기 시작한 것이 

임진왜란 이후인 것을 고려하면 이들 고산족의 

‘지’야말로 김치의 원형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카족 여자 아이들이 즐기는 고무줄놀이나 라후족 아이들의 비석치기 놀이를 보면 ‘뭐지’할 정도로 

어리둥절해집니다. 

여인들이 색동저고리 옷을 입고 강강술래와 비슷하게 원을 그리며 도는 민속춤은 고구려 벽화가 

시공을 넘어서 현실 세계로 나온 느낌입니다. 

글자가 없는 이들은 노래로 역사를 전합니다. 

자신들의 조상의 이름을 노래하며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스스로 북방 흰 눈이 내리는 곳에서 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 고종이 고구려인 3만 8천 3백호를 중국 남쪽 

광야에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들이 

아닐까요? 

나라를 잃고 버려진 고구려 유민의 자손이 

이들이라면 흥미로운 일입니다. 

중국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습니다.

'동이족은 구슬 장식을 즐긴다'는 중국 후한서 

기록은 아카족 여인들 머리에 구슬 장식이 

입증하는 듯합니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이들이 쓰는 말입니다. 

어순이 우리와 같습니다. 

중국어나 태국 라오스어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 

순이 아니라. “주어 목적어 동사” 순입니다. 

또 나를 '나'라고 하고 너를 '너'라고 하는 것도 

놀랍습니다. 

라후족말로 ‘가다’는 ‘카이메이’입니다. ‘나는 매홍손에 간다’를 라후족의 말로 바꾸면 “나 매홍손 

카이웨이"가 되는 것입니다.

"내래 매홍손 가메" 라는 북한사투리와 거의 

똑같습니다. 

나라 잃고 산악에 흩어진 고대 버전 보트피플이 

바로 라후 아카 리수족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이유입니다.


발췌 : 트래블바이크뉴스(Travelnbike News)

도이창 본사 사무실

정신적 지도자 '피코 사에두'
정신적 지도자 '피코 사에두'

Royal Project



 아카족은 중국 중부에서 티벳, 네팔과 버마를 경유하여 왔다는게 정설로 알려져 있으며 태국에만 7만여명 살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카족은 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도심에 정착하기어려워  태국 북부 치앙라이와 치앙마이 고산지대에 정착하는데 그 중 일부가 도이창 빌리지에 정착한 후 생계를 이어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편을 키우며 그로인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문제는 아카족은 태국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교육 및 의료혜택등 기본적인 혜택을 태국정부로부터 받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불법노동(주로 아편 재배)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제노역, 마약중독과 각종 범죄 등에 연루되었고 도시의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기 쉬운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이러한 안타까운 사정을 접한 푸미폰 아둔야뎃의 태국 왕실 주도하에 로열프로젝트(Royal Project)가 시작됩니다. 치앙라이 지역의 각종 정보를 수집한 결과 도이창 지역 기후가 커피 재배에는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태국 왕실은 아카족에게 아편의 재배를 멈추고 커피재배를 권장했지만 아카족은 커피재배를 해본적이 없었고 커피나무를 키우기 위해 최고 수년 또는 수십년    동안은 산기슭을 개간하고 새로운 품종의 나무를 심고 기다려야 하는 고되고 힘든 시간을 버터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DoiChaang Original Coffee Co. 


 그러한 두려움속에서 쿤 위차 프롬용 (Khun Wicha Promyong)이라는 지도자의 지휘하에 치앙라이 고산지역 가파른 산비탈에서 수년 동안 걸쳐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카족 고유의 근면 성실함과 살고자하는 삶에 대한 의지로 커피재배, 연구개발과 생산등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고 현재도 전통방식의 재배와 현대적인 방식을 규합하여 최고의 커피 생산지의 경작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수 년간의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DoiChaang Original Coffee Co.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이고 성공적인 커피 생산자로 자리 매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최고의 스페셜티커피 생산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도이창 아카족의 비하인드 스토리?


  태국 고산족들 중 아카족이 유독 한국인 여행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풍습이 역사책에 나타난 고구려 풍습과 판박이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데릴사위제를 유지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형사취수’까지 고구려 옛 풍습을 닮았습니다.

  닭을 옆에 두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우리 옛 풍습과 비슷합니다.

 아카족이 김치를 담가 먹는 것도 경이롭습니다. 

 아카족은 김치를 ‘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김치를 ‘묵은 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지가 김치의 어원임을 알수 있습니다. 

 단지에 담은 아카족의 ‘지’는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거의 백김치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우리가 고춧가루를 넣은 김치를 먹기 시작한 것이, 임진왜란 이후인 것을 고려하면, 이들 고산족의 ‘지’야말로 김치의 원형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카족 여자 아이들이 즐기는 고무줄놀이나, 라후족 아이들의 비석치기 놀이를 보면 ‘뭐지’할 정도로 어리둥절해 집니다. 

 여인들이 색동저고리 옷을 입고 강강술래와 비슷하게 원을 그리며 도는 민속춤은, 고구려 벽화가 시공을 넘어서 현실 세계로 나온 느낌입니다. 

 글자가 없는 이들은 노래로 역사를 전합니다. 

 자신들의 조상의 이름을 노래하며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스스로 북방 흰 눈이 내리는 곳에서 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 고종이 고구려인 3만 8천 3백호를, 중국 남쪽 광야에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들이 아닐까요? 

 나라를 잃고, 버려진 고구려 유민의 자손이 이들이라면, 흥미로운 일입니다. 

 중국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습니다.

 '동이족은 구슬 장식을 즐긴다'는 중국 후한서 기록은 아카족 여인들 머리에 구슬 장식이 입증하는듯 합니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이들이 쓰는 말입니다. 

 어순이 우리와 같습니다. 

 중국어나 태국 라오스어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 순이 아니라, “주어 목적어 동사” 순입니다. 

 또 나를 '나'라고 하고 너를 '너'라고 하는 것도 놀랍습니다. 

 라후족 말로 ‘가다’는 ‘카이메이'입니다, ‘

 나는 매홍손에 간다’를 라후족의 말로 바꾸면, “나 매홍손 카이웨이"가 되는 것입니다.

"내래 매홍손 가메" 라는 북한 사투리와 거의 똑같습니다.

 나라 잃고 산악에 흩어진 고대 버전 보트피플이, 바로 라후 아카 리수족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이유입니다.


발췌 : 트래블바이크뉴스(Travelnbike News)

혹시 족자의 한자 '이'는 성씨를 말하는건 아닐까요?
혹시 족자의 한자 '이'는 성씨를 말하는건 아닐까요?